베이징(北京,북경)은 약 700년간 중국 수도의 자리를 지켜왔다. 단지 산시성(陝西省)의 장안(長安)과 허난(河南)성의 뤄양(洛陽)만이 베이징이 제국의 수도로 있던 장구한 세월과 맞먹을 수 있을 것이다. 베이징은 중국 북쪽에 있는 산자락과 끝이 맞닿은 넓은 평원이었는데, 약 70만년전부터 인류(北京猿人)가 살았다고 한다. 기원전 2700년에 현재 베이징이 자리한 지역에서 황제가 중국을 통치했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베이징은 일찍이 화베이(華北)평원과 북방의 산간지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역사상에 등장하였다. 베이징은 처음에는 ‘지(蓟,계)’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 고대취락의 위치는 현재 루거우차오(蘆溝橋,로구교)가 있는 곳이다.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평야지대와 산간지대 사이의 교통이 빈번해지자 그 교통로의 요충을 차지한 고대취락이 점차 발전하여, 주대(周代) 초에는 연(燕)나라의 도읍(都邑) 계성(蓟城)이 그곳에 조영되었다. 진(秦)•한(漢) 이후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대체로 유주(幽州)의 치소(治所)로서 동북변방(東北邊防)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의 고구려 원정(遠征)때에는 다같이 계성(蓟城)을 그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한 뒤 전몰장사(戰歿將士)의 넋을 애도하여 민충사(憫忠寺:지금의 베이징 외성에 있는 法源寺의 전신)를 건립하였다. 오대(五代)에 이르러 요(遼)나라는 938년에 이곳을 부도(副都)로 삼아 남경(南京)이라 하고, 요나라를 물리친 금(金)나라는 처음 연경(燕京)으로 부르다가 1153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중도(中都)라고 고쳤다. 다시 몽골족이 남하하여 중도성(中都城)을 빼앗은 뒤 쿠빌라이(忽必烈) 때에 신성(新城)을 건설하고 국도로 정하여 대도(大都)라고 개칭하였다.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하여 원(元)나라를 세우자 대도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정치중심지가 되었고, 마르코 폴로(馬可波羅)는 칸발릭(Khanbalik)이라는 도시명으로 그 호화로운 번영상을 기록하고 있다. 명대(明代)에는 처음 국도를 지금의 난징(南京)에 두었다가 1420년에 영락제(永樂帝)가 이곳을 국도로 정하고 북경(北京)이라 하였는데, 베이징이라는 명칭은 이때에 비롯되었다. 명대에는 남문(南門) 밖에 외성(外城)을 구축하고 북부의 성역(城域)을 대도 때보다 축소하여 내성(內城)이라 불렀는데, 그 내•외성이 지금의 베이징성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淸)나라도 1644년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국도로 하였는데, 만족(滿族)과 한민족의 거주지역을 구분하여 내성에 만주족, 외성에 한민족을 살게 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에도 계속 이곳을 국도로 삼았으나 북벌(北伐) 완성 뒤 난징으로 천도하여, 이곳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의 지휘아래 천안문에서 베이징에서의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 설립을 발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베이징은 다시 그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