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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의 중요성을 느낀 시기 및 계기.
국제학교를 다녔을 때는 항상 영어 잘하는 아이들이 옆에서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아서 통역을 해줬기 때문에 영어의 중요성을 잘 깨닫지 못했지만, 인도 사립학교 비숍코튼으로 학교를 옮길 때부터는 모든 것을 나 혼자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실제로 나의 인도 유학은 11학년부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수업 도중 선생님 말씀이 너무 빨라 알아 듣지 못해서 필기를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선생님이 야단치기도 했고, 그러다가 반 아이들의 웃음세례를 받아 얼굴이 붉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게 모두 그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던 나의 탓이었다. 인도 국제학교에 다닌 많은 아이들은 80% 정도가 도중에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와 검정고시를 보고 토플 같은 것을 공부해 한국의 대학에 들어간다. 나는 인도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잔소리 걱정 하나 없이 실컷 놀다가 나중에서야 인도에서의 공부를 견뎌내지 못하고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돌아온 아이들을 보면 정말 한심스럽고 그 동안 노느라 썼던 돈과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인도를 알고, 인도친구를 사귀고, 인도의 문화와 학문에 대해서 알아야만 인도유학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인도에서 대학을 가야 했기에 성적 관리를 해야 했고, 부모님들도 전혀 알지 못하는 인도의 입시에 대해 선생님들께 물어 스스로 정보를 찾아내야 했다. 마음 편하겐 먹어서는 내가 원하는 대학에 결코 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학창시절 하루 일과에 대하여.
인더스 국제학교에 있었을 때는 항상 기숙사 사감이 6시에 음악을 틀어 모두를 깨워 기숙사학생 모두가 운동장에 모여 1시간씩 아침 조깅을 했고, 7시부터 8시까지는 씻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8시부터 8시 30분 까진 학교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었고, 9시부터 1시까지 오전 수업, 1시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을 가졌고, 2시부터 3시 30분까지 오후 수업을 했다. 그리고 4시 30분까지 자유시간을 갖고 다시 5시 30분까지는 기숙사 학생들 모두가 운동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엔 육상부였던 나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뒤 30분씩 운동장을 뛰었고 나머지 30분 동안은 친구와 스쿼시를 쳤다. 그리고 나서 씻고 준비해서 6시부터 8시까지 하는 공부시간에 맞춰 사복을 입고 다시 학교를 가야 했다. 8시부터 9시까지 저녁 시간으로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서 밖에서 아이들과 산책을 하며 어울리거나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했다. 기숙사로 돌아와 9시에 10시까지 다시 자유시간을 줬고 10시에는 자발적으로 불을 꺼야 했다. 만약 불이 켜져 있거나 다른 아이 방에 머무는 것을 사감에게 걸리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저녁에 몰래 공부를 하고 싶거나 친구들과 몰래 수다를 떨고 싶을 땐 스탠드를 수건으로 막아 빛이 새어 나가게 않게 하고는 놀았다. 이런 생활이 주중에 반복되는 바람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비숍코튼에 다닐 때에도 항상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 밥을 차려먹고, 준비를 한 뒤 학교를 갔다. 방과후 집에 와서는 바로 씻고 휴식시간을 가진 다음 밥을 먹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운동으로 조깅이나 훌라후프, 스트레칭을 했다. 그런 뒤 샤워를 하고, 숙제를 하고, 예습 복습을 한 뒤 잠을 잤다.
뭄바이에서 12학년을 다닐 때에는 학교가 오후 12시에 시작해 6시에 끝났고, 피지의 시끄러운 생활로 항상 하루 일과가 학교 갔다 오는걸 제외하곤 그때그때 달랐다.
 
방학 때 학습방법과 여가시간 활용은.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 겨울 방학 때 아빠와 단둘이 베트남, 캄보디아를 여행했었다. 그 뒤 인도로 유학을 가서 방학 때마다 아빠께서 인도에 오시면 함께 배낭 여행을 다녔다. 인도에 온 첫해부터 남인도를 돌았고(이때 쓰나미를 만나 큰일날 뻔했다), 그 중에서도 오로빌, 함삐, 고아, 할레비두 등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지다. 아빠와 함께 여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큰 배낭을 메고 버스를 타고, 방을 구하고,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깐냐꾸마리(인도 최남단)를 벗어나 밤늦게 마두라이에 도착해 어느 호텔에 묵게 되었는데, 어떤 가게 아저씨가 우리가 오전에 머물던 지역에 쓰나미가 덮쳐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태국과 인도, 스리랑카에서만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어쩐지 그날 따라 어디를 가든 습기가 가득 했고 호텔 방에는 개미 때들이 득실거려 잠을 잘 수 없었다. 우리가 떠난 지 한 시간 후에 쓰나미가 덮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인도의 시바나 비슈누 신이 정말 우리를 도와주고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식은땀이 흐르고 닭살이 돋고 밥맛을 잃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한국으로 전화를 해보니 우리가 실종되었다고 인도대사관에 신고한 어머니는 죽은 줄 알았던 우리들 목소리를 반기느라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무사히 배낭여행을 마쳤고 앞으로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었다. 그 뒤 무서운 것이 없어진 나는 엄마 친구분들을 모시고 여행 가이드 일을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이번 겨울 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배낭여행을 갈 생각이다.
하지만 여름방학 때에는 내가 유일하게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기간이라 2달 동안 읽지 못했던 한국 책도 읽고, 친구들도 만나며 옷이나 필수품 쇼핑을 하고, 충분히 휴식시간을 가진 다음 인도로 돌아간다. 앞으로는 디자인과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인턴십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고, 전람회나 연극과 같은 것도 열심히 가볼 예정이다. 미술 관련 서적들도 더 많이 읽고, 인도와 관련된 책도 더 많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금액과 조달 방법.
아직 까지는 부모님께서 대학 등록금을 내주시고 계시지만 작년부터 제이제이에 다니면서 ‘통역’과 ‘관광 가이드’ 일들이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자주 들어온다. 그때 하루당 적어도 150달러 정도를 번다. 나는 생활비를 직접 벌어서 쓰려고 한다. 올해에는 좀더 분발해서 부모님 손을 빌리지 않고 대학 등록금도 벌어보고 싶은 생각도 난다. 
나는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서 매우 알뜰한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곁에서 떨어져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처음 인도로 유학 오는 아이들이 쓰는 생활비의 절반 밖에 쓰지 않지만 그것도 많다고 생각된다. 음식도 거의 밖에서 사먹지 않고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 먹고, 정말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에만 돈을 쓰기 때문에 이것 저것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돈을 낭비하는 친구들과는 다르다. 나는 충동 구매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선지 경비를 다른 유학생의 반도 쓰지 않는 듯하다. 친구들이 내가 한 달에 동생과 함께 쓰는 생활비를 말하면 다들 놀라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알뜰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인도에서는 뭐든지 흥정을 잘하면 적당한 값에 구매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아빠와 배낭여행을 하면서 배운 것이지만, 인도인들은 외국인인 우리에게 항상 현지인들에게 부르는 것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부른다. 보통 유학생들은 조금 흥정을 하고 말지만 나는 피지에서 1년간 인도친구들과 지냈기 때문에 인도 문화를 직접 접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도인들의 그럴싸한 말에 놀아나는 일이 없어서 경비가 절감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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